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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미디어

[대중문화와 영화비평] 현대사회에서의 관객과 평론가의 지위

by 개성공장 202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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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의 관객과 평론가의 지위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시오. 


빨간 테 안경과 짧은 시처럼 느껴지는 영화 한 줄평으로 유명한 이동진 평론가는 자신의 한줄 영화평으로 논란에 오른 적이 있다. 칸영화제와 아카데미에서 무수한 상을 받아 한국의 자랑이 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한 평이 그것이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 속에서 상승의 이미지, 하강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등장하고, 블랙유머가 전면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신랄하고, 비극으로서 처연하고, 핵심 주제가 계급이라는 것, 영화의 마무리가 우화와 닮았다는 점에서 걸맞은 비평이라고 볼 수 있다. 논란이 된 부분은 '명징하게 직조해낸' 부분이었다. 논란의 이유는, 평론가가 너무 어려운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전적 의미로 '명징하다'는 깨끗하고 맑다는 형용사이거나, 동사로는 사실이나 증거로 분명히 한다는 의미이다. 직조하다는 기계나 베틀 따위로 천을 짜다라는 의미이다. 둘 다 한문으로 이루어진 단어이고 많이 쓰이는 단어는 아니라는 점에서 평론가가 지적인 허영을 부렸다는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한 논란은 성인의 문해력, 문장 이해와 국어 능력에 대한 논란으로 확대되었다. 일상 속에서 항상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해석이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반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명징하다는 표현보다는 명확하다는 단어를, 직조하다는 말보다는 (뜨개질로) 떠냈다, 혹은 짜내었다는 표현을 주로 쓰긴 했지만 처음 들어본 단어가 아니었으며 문장 속에서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도한 비난이라고 생각했다.
해당 사건은 평론가의 지위가 상당히 추락했다는 기념적인 해프닝으로 볼 수 있다. 평론가의 지위 하락은 평론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즘의 위상 하락과 일치한다.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수많은 혐오 표현 중에, 특정 직업군을 향해 널리 통용되는 단어가 있다. ‘기레기’가 그것으로, 기자와 쓰레기를 합성한 단어이다. 기자와 매체가 가진 정치적 경향성을 두고 비난하고자 탄생했던 단어지만 확산되어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기자가 어떤 기사를 쓰던지 댓글로 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댓글문화 속에서는 이런 눈살 찌푸려지는 행태가 가장 잘 드러나며 어떤 자정작용도 이뤄지지 않는다. 저널리즘의 위상도 이에 따라 떨어졌다. 언론 신뢰도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많은 평론가들은 기자의 직업으로부터 출발한 경우가 많다. 혹은 평론가가 기자를 같이 수행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전반적인 저널리즘에 대한 비신뢰가 만연하고, 평론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영화나 드라마를 소비하는 방법은 극장과 텔레비전을 통하는 것이 전부였다. 양방향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단방향 매체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양이 급속도로 많아지면서 질의 차이도 급격하게 드러났다. 관객들은 텔레비전의 보급부터 동영상 서비스 및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을 선택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작품 수의 증가만 이뤄졌다면 평론가들의 일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발전은 매체만 많아진 것 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글쓰기 공간 또한 넓어지게 했다. 사람들은 구독료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인 인쇄매체인 신문과 잡지는 쇠퇴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자와 평론가들의 수가 줄어들고, 기사의 질적 하락을 가져오며 동시에 각 개인들이 정보의 소비자로부터 생산자가 되며 기존의 주된 정보 생산자인 기자, 평론가, 저널리스트들의 위상은 하락하게 되었다. 영화 소개 유튜브를 보면 직업 평론가들의 비평보다는 얼마나 영상편집 기술이 매끄럽고 맛깔난 추임새를 잘 쓰는지에 따라 인기가 결정된다. 기존의 평론가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문장력에 대해 선망하거나 따라 하고자 했던 대중은 소비와 생산의 주체가 되면서 보다 단순하고 쉬운 글을 선호하게 되었다. 단순히 선호하는 것을 벗어나, 글이 어려우면 쉽게 고치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세태가 결국에는 명징과 직조라는 단어로 비판까지 받게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관객과 평론가의 분류가 의미가 퇴색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관객과 평론가의 분류보다는 관객과 영화를 전공한 관객, 혹은 영화를 많이 본 관객 정도의 차라고 생각된다. 평론가가 되는 방법이 쉬워졌으며, 이제는 양산되는 정보가 너무 많은 것이 그 이유이다. 논의의 장이 넓어지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아쉬운 것은 단편적인 리뷰가 기준이 되면서 보다 깊고 복잡한 사고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편적인 리뷰를 통찰력 있게 파고들어 짧게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지만, 대다수는 표면적으로만 고찰하기 마련이다. 관람에 있어서 더 뛰어남과 그렇지 않음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자의 의도를 간파하고 자신만의 생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은 분명히 짜릿한 일이다. 이전에는 소수의 평론가가 나름의 가이드를 제시했다면, 이제는 평론가의 난립으로 통찰력 있는 뛰어난 평론가를 택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평론가뿐만이 아니라 저널리즘 전반에 대해서도 일반 관객의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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